“무리, 제자 그리고 성찬의 사도들”

<누가복음 17장 5-10절>

1. 무리와 제자

오래전부터 설교가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무리와 제자’를 구분해서 설교하곤 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이런 구분을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요, ‘무리와 제자들’,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구분하자면, ‘무리’는 예수님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을 지칭하고요, ‘제자’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무리와 제자가 뒤섞인 채로 예수님을 따르기도 해서 이 둘을 구분하기가 애매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세밀하게 구분해보면, ‘무리’는 설사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해도 자신의 ‘목적’을 채우기 위해 따라다닌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무리’를 향하여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아니냐!”(요 6:26)라고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곧 ‘무리’는 예수께 자신의 인생을 걸지 않습니다. 다만 구경꾼처럼 멀리 떨어져서 예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만을 탐하는 사람들이곤 했습니다.

반면에 ‘제자’는 다릅니다. 일단 제자는 예수께서 친히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 제자입니다. 무리들은 이러한 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것은 전통적으로 유대 랍비 사회에서는 어떤 스승에게 배울지 제자들이 선택하고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데이빗 왓슨 지음, 문동학 옮김, 『제자도』(두란노)> 곧 친히 찾아가셔서 “나를 따를라!”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 랍비의 제자와 예수님의 제자가 다른 점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부르실 때 자신의 인생을 걸고, 모든 것을 내버리고 그 부르심에 순응한 사람들이 제자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따라다니기만 했던 무리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따라다녔다고 해서 모두가 저절로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도 제자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제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고 배척받으시는 분으로서만 그리스도이실 수 있듯이, 제자도 고난받고 배척받는 자로서만, 십자가에 함께 처형되는 자로서만 제자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김순현 옮김, 『나를 따르라』(복있는사람)> 본회퍼 목사님은 이와 같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행위를 “양도할 수 없는 진리”(unveräußerlichen Wahrheit)라 말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양도’讓渡라는 말은 “권리나 법률상의 지위를 남에게 넘기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양도할 수 없다는 것’은 ‘절대적’이란 뜻입니다. 남에게 떠넘길 수 없고, 은근슬쩍 물러설 수도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서 ‘그런 척’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을 준행하는 자만이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오직 ‘긍휼하심을 입은 제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무리입니까? 아니면 제자입니까? 이런 물음을 여러분에게 던지고 있지만,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게도 물어봤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저는 무리도 아니고, 제자도 아닌, ‘무리와 제자’ 그 중간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우리 중에 ‘나는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를 믿습니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분명 ‘무리’에 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나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온전히 따르고 있습니다’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참된 제자라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행인지 어떤지는 몰라도, 복음서에서 우리는 참된 제자의 모습을 찾지 못합니다. 하나부터 열둘까지 제대로 된 제자 하나 없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서에서 좌충우돌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무리’에서 겨우 벗어나서, 이제 막 제자도를 훈련하고 있는 초보 훈련생의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가수 김광석이 노래한 것처럼 집에서 응석받이로 살다가 이제 막 “부모님께 큰절하고, 집 떠나 열차 타고 훈련소로 향하는” 그 까까머리 초보 훈련병의 모습, 그 모습이 복음서에 나오는 열두 제자들의 모습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모습에서 사실상 우리가 배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어떤 점에서는 우리보다도 못한데 말입니다. 다만 배울 게 있다면, ‘아,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반면교사로서의 모습만이 복음서에 여과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비록 온전한 제자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 주님 말씀이 잘 믿어지지 않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믿긴 믿지만, 그게 삶에 옮겨지지 않아서 날마다 자괴감에 빠지는 것, 이 또한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듣고-만지고 3년이나 함께 살았던 제자들도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3년이라는 특수훈련을 받고서도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기는커녕 뿔뿔이 도망친 장본인들이 바로 그 열두 명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그들이 그처럼 못났고, 아둔하고, 비겁했었어도, 예수께서는 저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제자인 것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전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배신하고 숨어버린 그들이 혹여 죄책감에 빠져있지는 않을까 걱정하셔서, 부활하신 주님은 친히 저들을 찾아가시고는 두 번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축복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못나도, 나는 너희의 스승, 너희는 내 제자! 너희는 나를 버렸어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겠다!’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못난 제자들을 향한 긍휼을 거두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제자도를 완벽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제자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긍휼하심을 입은 제자’로서만 그들은 여전히 제자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제자도에 턱없이 모자란 삶으로 주님 앞에 불충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한 긍휼하심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제자입니다. 곧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도 오직 ‘긍휼함을 입은 제자’ 로서만 제자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사도적 제자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7장 5-10절까지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잠깐 누가복음 17장 1절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제자들”(maqhth,j)입니다. 예수께서는 1-4절에서 제자들에게 “실족시키지 말라”는 것과 “용서하라”는 두 가지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5절은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5절)라고 시작합니다. 분명 같은 사람들이지만 ‘제자’가 아닌 “사도들”(avpo,stoloj)의 요청이었다고 누가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제자’(maqhth,j)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사도’(avpo,stoloj’)는 ‘보냄을 받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로써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왜 부르셨던 것입니까?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을 ‘부르셨다가’ 여러 번 ‘보내신’ 적이 있습니다. 제자 훈련을 시키시면서, 사도 훈련도 겸해서 시키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둘씩 보내셨다”(7절) 하고요, 누가복음 10장에서는 “칠십인을 세워 각동 각처로 둘씩 보내셨다”(1절)고 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22절)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아직 완벽하지도 않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설익은 제자들, 예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처음부터 사도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4. 사도적 실행: 행하라!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저 세상으로 보내실 사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 5절에서 사도들은 예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두 가지 가르침을 주십니다.

첫째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라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마치 영화 속의 무시무시한 마법사가 보일 법한 기괴한 일들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여의도 KBS 방송국을 남산 꼭대기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그런 말씀일까요? 우리에게 그만한 행할 믿음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곧 작은 믿음이라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족하고 모자란 것은 무엇입니까? ‘실행하는 것’ 입니다. 비록 너희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한 초라한 믿음일지라도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주눅 들지 말고, 두려움에 머뭇거리지 말고,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라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행하면 너희가 기대하지 못한 일, 너희가 예상하지 못한 놀랍고도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똑똑히 보게 될 것이란 말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완벽한 제자도 없고, 완벽한 사도도 없습니다. 다만 작디작은 믿음일지라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일에 순종하고, 실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비록 실패하고 넘어진다고 해도, 우리 주님이 그 일보다 앞서 행하시고 끝내 완성시켜 주실 것을 굳게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사도적 겸손: 무익한 종인 줄 알라!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께서는 ‘스스로 무익한 종인 줄 알라’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시킨 일을 잘 준행하고 그 명령을 온전히 수행한 뒤에라도, 자기가 한 일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라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적 삶은 자기가 일한 만큼 급여를 받고, 성과급을 받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오직 자비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받든지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는 삶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종’의 신분을 두고 말씀하셨는데요, 성경에는 ‘종’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디아코노스’(dia,konoj) 그리고 다른 하나는 ‘둘로스’(dou/loj)입니다. ‘디아코노스’는 ‘섬기는 자’ ‘일꾼’을 뜻하고요, ‘둘로스’는 그야말로 누군가에 종속된 ‘노예’를 뜻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 둘 중에 어느 것일까요?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였습니다.

그러니 노예는 처음부터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보수나 급여 따위를 기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직 주인의 자비와 은혜만을 바라며 사는 삶이 종의 삶이며, 그것이 사도적 삶이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성찬의 사도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 오늘 주님의 말씀이 다소 종이란 신분을 비하하는 것 같아서 불편하신 분은 없습니까? ‘이건 좀 심하다’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하루종일 밭과 들에서 수고한 종에게 ‘수고했다. 잘했다. 와서 쉬라’ 하기는커녕, 8절에서처럼 “도리어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시는 주님 말씀이 못미덥게 들리지는 않으십니까?

그런데 누가 이렇게 사셨던가요? 누가 이런 종처럼, 아니 노예처럼 사셨던가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습니다. 저 위대한 사도 바울의 선언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본체이셨지만, 오히려 이 땅에 종으로, 아니 노예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분이, 종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종이 되셨던가요? 여러분과 저의 종이자 노예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집 안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허비하고 헛된 낭비와 불충한 죄의 삶을 살 때, 우리 주님은 하루 종일 우리의 먹거리며 음료가 될 만한 것들을 구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쇼파 위에 널브러져서 손가락 까딱이며, 종에게 말하듯 주님께 말하기를, “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너는 수종이나 들고 그 후에 먹으라”는 심보로 주님을 뒷전으로 밀쳐왔던 것은 아니었던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설교를 마친 뒤에 오늘 우리는 [세계성찬주일]을 맞아 성만찬 의식을 거행하고자 합니다. 이 식탁은 스스로 종이 되신 주님이 친히 마련해 주신 식탁입니다. 이 식탁은 화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 두 개의 메뉴만 식탁 위에 나란히 올려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빵과 포도주는, 자신을 노예 부리듯 학대하며 불충했던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살리시고자, 우리 주님이 자신의 살과 피로 친히 마련해주신 식탁입니다. 그 식탁은 주님의 살과 피, 곧 주님의 ‘생명의 식탁’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라면, 독선적인 사람들이라면, 자기만족에 빠져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면, 십자가는 그런 여러분들을 초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바닥에 꿇어 엎드려 자복하는 자세가 준비되었다면, 감히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자라면, 십자가 아래로 흐르는 주님의 피는 여러분들을 초대할 것입니다.”<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서창원 옮김, 『십자가』(두란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거룩한 식탁에 동참할 때, 무리를 넘어 제자로, 그리고 제자를 넘어 사도로, 그리하여 우리를 위해 종이 되신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고백하는 ‘성찬의 사도들’로 거듭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