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가졌는가? 그 사람이 되려는가?”

(창 7:1-16, 22-24)

<2024년 2월 18일 사순절 제1주 설교 / 보라색>

●용사와 네피림의 세상

지난주 ‘재의 수요일 예배’를 시작으로 우리는 2024년 사순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때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는 절기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주님의 명령 앞에 복종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40일의 여정을 통해서,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우리 안에 심겨진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서, 40일이 지난 뒤에 큰 기쁨과 소망으로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주 우리는 창세기 6장을 통해서 ‘가인의 후예’와 ‘셋의 후예’가 함께 어울려 살게 되었고, 그 결과 저들이 낳은 자식들은 누가 가인의 후예고 누가 셋의 후예인지 모를 정도로 타락한 인류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저들은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용사’(‘깁보어’, rABGI)라 하는 자들로서, 세상 위에 군림하여 ‘자기의 이름을 드높이려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네피림’(Nephilim)이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첫째, 그 이름이 ‘타락한 자들’을 뜻한다는 것과 둘째, 그들이 ‘키가 장대한 자들’이라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은 ‘당시에 네피림이라는 신비로운 존재’ 따위가 살고 있었음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네피림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제아무리 장대해도, 그 몸-‘집’에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으면, 그냥 ‘몸뚱이’에 불과한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뼈가 굵고 우락부락한 인간이었을 지는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을 상실한 육체-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로써 그게 용사든, 네피림이든, 하나님의 영이 거할 수 없는 인간이란 그저 타락한 존재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창 6:3)

●저들의 악함을 ‘보시고’, 생명의 영이 떠나시다.

하나님의 영이 거할 수 없는 인간이란 과연 얼마나 비참한 존재입니까? 한마디로 그들은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만을 위한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이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니라”(롬 8:5-6)고 말한 것처럼, 당대 인류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습니다. 숨을 쉬어도 죽은 것입니다.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되어 인간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 1947-)는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짧고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영이 떠나시면 결국 죽을 운명이다.”<크리스토퍼 라이트 지음, 홍종락 옮김, 『구약에 나타난 예수, 성령, 하나님』 성서유니온> 당대 인류는 죽음을 자초했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는 뜻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대적했고, 서로 물고 먹으면서 땅 위에 지옥을 확장해나갔던 비루한 인간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탄식하시며 창세기 6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롸아’, ha'r')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창 6:5-7a) 12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보신즉(‘롸아’, ha'r')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히브리어로 ‘보다’(‘롸아’)라는 단어는 단순히 쳐다보는 게 아니라 “분별하다, 검사하다”(discern, inspect)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감정에 치우치거나 즉흥적인 게 아니었습니다. 철저한 검사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면 반드시 검수하게 됩니다. 문제 있는 제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없습니다. 벌레 먹은 과일을 상점에 납품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도자기를 굽던 도공이 하자 있는 도자기를 내던져 깨뜨리듯이, 세상을 보신 하나님, 세상을 분별하여 검사하신 하나님은 심판을 결행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인간 실격』입니다.

●마지막 기회, 그리고 기억하라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아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심판 예고에서 이어지는 창세기 7장을 읽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여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방주를 만들고, 이후로 하나님은 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방주에 실으라 하십니다. 그리고 드디어 대홍수가 목전에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끝까지 기회를 주셨다는 점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대홍수 심판이 목전에 놓였을 때, 하나님은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7일 뒤에는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당시 인류에게 ‘7일’이라는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최후통첩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지난주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120년의 기회를 주셨지만, 하나님은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그 기나긴 시간을 허랑방탕하게 살아온 인류를 향해 7일의 말미를 더하신 듯 보입니다. 대홍수로 인간을 쓸어버리고자 하신 것은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120년을 허비한 저들 발등에 도끼날이 이미 내려앉았어도, 심판을 물리시고자 끝까지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 심판 날을 똑똑히 기억하라 하십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성경은 대홍수가 일어난 날에 대해 기록하기를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달 열 이렛날이라”(창 7:11a) 하면서, 매우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구체적으로 날짜를 명시한 적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통치한 지 몇 년이 되었다’라든가, ‘누가 몇 살이 되었던 때, 몇 월 며칠’이라고 명시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날을 기억하고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기억해야 합니까? 대홍수가 일어난 그 날은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며 사람을 땅 위에서 모두 쓸어버린 ‘가장 슬픈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이 뜯겨나가고, 살갗이 도려지는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날을 인간이 잊어서야 되겠느냐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홍수 심판에는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눈물과 절망,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려 했던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진 ‘그 사람’: 남은-자 노아

이러한 대홍수 심판 과정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은 노아를 향해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6:9)고 말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과 땅이 부패한 것을 ‘보셨다’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것을 보십니다. 즉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라(‘롸아’, ha'r')”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단어는 앞에 나온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보시고 ‘의롭다’ 말씀하신 것도 즉흥적인 평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두고두고 노아의 생각과 마음을 들여다보시면서,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세상은 거칠고 오만한 용사요 네피림투성이였지만, 그는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온통 걸어 다니는 시체투성이였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영으로만 살았고, 하나님의 호흡으로 숨을 쉬었습니다. 세상은 타락하여 자기 갈 길로 떠났지만,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인데, 성경은 이런 자를 일컬어 ‘남은-자’(the Remnants)라고 부릅니다.

‘남은-자’로 살았던 노아를 생각할 때면 우리 민족의 스승이셨던 함석헌 선생님이 쓰신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만리 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함석헌 선생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 전문<함석헌 지음, 『수평선 너머』 한길사>

참으로 비장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가져다주는 시입니다. 특별히 시의 각 연이 끝날 때마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고 물을 때면,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노아를 가지셨다’고 성큼 대답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시가 말하는 것처럼, 노아는 하나님이 ‘맘 놓고 맡길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야말로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라고 말씀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빛을 위해 ‘노아만은 살려 두겠다’ 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온 세상이 찬성할 때, ‘아니’라고 가만히 머리 흔들며 세상의 유혹을 물리친 남은-자였기 때문입니다.

●남은자 노아: 은혜의 사람

그렇다면 성경은 남은-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남은-자를 말할 때마다 종종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아 있기만 하면, 혹은 남겨져 있으면 남은-자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의 사람’만이 남은-자입니다. 은혜를 갈망하는 겸손한 사람만이 남은-자라 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남겼다”(왕상 19:18)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칠천 명을 일컬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 11:4-5)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남은-자’는 필요-충분조건인 것입니다.

노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주 본문은 노아에 대해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유독 노아에게만 임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천지사방으로 뻗었지만, 오직 노아만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여 그 은혜를 입었다는 뜻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23절은 “지면의 모든 생물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고 하면서, 은혜를 입은 여덟 명의 가족이 하나님의 새창조를 위한 최종적인 남은-자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세기 7장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갖습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와 우리 시대는 얼마나 다른가?’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인류는 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는 부인하면서도 사이버 세계, 가상 세계를 이루지 못해 안달일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총은 믿지 않고 조롱하면서도, 인간 안에 무한한 초월적 능력이 잠재해 있다거나, 우주의 기운을 받는다느니 하는 허탄한 믿음을 곱상하게 포장합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유토피아’를 찾아 헤맸던 어리석은 용사와 네피림의 시대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이 떠나버린 시대 말입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중반에 생을 마감했던 프랑스의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 1888-1948)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는 당시 유럽 사회가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무신앙 사회’로 빠르게 변모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던 유럽의 지식인이자 신앙인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이 겪었던 전쟁의 비극은 또 다른 전쟁을 낳았고, 전쟁터는 ‘인간과 짐승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입증하는 실험실과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저지른 전쟁을 하나님 탓으로 돌렸고, 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을 의심과 회의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으며, 급기야 하나님을 우러르는 신앙 대신에, ‘신은 죽었다’를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이러한 무신앙의 전파는 재빨랐고 손쉽게 유럽을 집어삼키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신에 대한 불온한 도전과 회의, ‘신을 믿지 않음’이 마치 미덕처럼 여겨지는 음습한 풍조가 만연하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교회는 낡고 구태의연하여서 권태에 빠져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고 있을 때, 스페인의 한 외딴 섬에서 마치 노아처럼 여덟 식구를 부양했던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노스는 한 편의 소설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정영란 옮김, 민음사>라는 책이었습니다.

소설은 프랑스의 어느 외딴 시골 마을에 젊은 신부가 부임한 뒤로, 위암에 걸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써 내려간 일기로 되어 있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로 인해서 신부는 시대로 인해 절망하고, 무기력한 교회로 인해 가슴을 쓸어내리며 일기를 씁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가치는 사치처럼 느껴질 뿐이었고, 마을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도 온통 자기 생각만을 거칠게 주장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소설은 이러한 시대를 ‘권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은혜의 부재’, ‘신앙의 부재’,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은 ‘권태’였던 것입니다. 소설 속 신부는 이렇게 일기를 씁니다.

“내 본당은 권태에 먹혀들고 있다. 권태가 본당 모두를 우리 보는 앞에서 아귀아귀 먹어 대는데도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 마을은 탈진한 가여운 한 마리 짐승마냥 물기 어린 풀숲에 그냥 누워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이 마을이 내 본당이다.”

세상은 무기력했고, 그만큼 교회도 무기력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인간들이 세상은 물론이고 교회 예배당에도 마치 탈진한 짐승처럼 널브러져 있다는 지적입니다. 작품 속의 젊은 신부가 맞닥뜨린 세상은 마치 노아 시대의 인류를 보는 듯 아찔하기만 합니다. 이처럼 비통한 심정으로 하루하루 지쳐가던 신부는 자신의 신앙을 다잡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신앙을 잃지 않았다. 가혹한 시련이 순식간에 들이닥쳐서 나를 뒤흔들어 놓을지라도, 기도의 정신은 고갈해 버리고, 커다란 절망이 엄습하여 암담한 체념으로 나를 가득 메울지라도, 내 신앙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 나는 신앙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세상과 맞서 싸우던 신부는 소설 끝에 이르러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위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은 초월적 가치를 상실하여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신부는 그런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했고, 사랑의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값지게 살아낸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설 속 젊은 신부는 그 불운한 시대의 ‘남은-자’요, ‘노아’였던 것입니다. 여덟 명의 식구를 부양했던 작가 베르나노스가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그 사람이 되려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창세기 7장을 통해서 타락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대홍수 심판과 당대 의인이요 남은-자였던 노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은-자였던 노아로 인해 새로운 창조 역사를 이어가고자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6절에 보면, 남은-자들을 안전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노아의 방주는 문을 안에서 닫을 수 없습니다. 밖에서 닫습니다. 이것은 방주 안에 들어 있는 남은-자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함과 동시에, 문을 ‘열고-닫음’은 오직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신뢰하라는 것을 뜻합니다. 즉 방주 안에 거하는 남은-자들이 살 길은 ‘방주를 지으라 명령하신 하나님’, ‘홍수를 일으키신 하나님’ 그리고 ‘방주의 문을 닫고 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은-자는 방주 밖에서도 은혜의 사람이며, 방주 안에서도 오직 은혜로만 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방주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곧 방주는 ‘방향키’가 없고 ‘노’를 젓지도 못합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자기들 원하는 곳으로 방주를 끌고 가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조차 허락지 않습니다. 본문 18절이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라고 말하는 것처럼, 방주의 최선은 ‘잘 떠다니는 일’일 뿐입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곳, 그리하여 은혜로만 살고, 은혜로만 죽는 곳, 그곳이 방주입니다.

아일랜드라는 나라는 오래된 수도원으로 유명합니다. 이미지를 잠깐 보시면, 우리나라의 독도처럼,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작은 바위 섬이 있습니다. 지금 이곳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는데, 이곳에 이미지처럼 유명한 수도원(Skellig Michael)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아일랜드의 (켈트) 수도사들은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로 마음먹고, 작은 배에 몸을 실어 망망대해로 향하던 전통이 있었습니다.(‘백색순교’)

저들은 노아의 방주처럼 오직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기를 소망하며, 그림으로 보시는 저 작은 배(Irish Cruach Boat)를 타고, 방향키도 없고 젓는 노도 없이, 그저 배가 닿는 곳이 주님이 원하는 곳이라 믿고 배에 올랐습니다. 배가 뒤집히면 그것을 주님의 뜻으로 알아 순교할 것이며, 배가 어느 곳에 정박하게 되면 그곳에서 죽는 날까지 수도 생활을 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외딴 작은 돌섬에 수도원이 유독 많이 있던 이유가 그것입니다.

이처럼 노아의 방주는 방향키가 없고, 젓는 노도 없고, 밖에서 문을 닫아주시는 분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여정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하나님이 오늘날 노아와 같은 남은-자를 찾으신다면, 하나님은 어디서 찾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남은-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방주와도 같아서, 문을 닫아주시는 분의 은총만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방향키를 우리 맘대로 조정하며, 주님의 뜻은 부차적일 뿐, 내가 다니고 싶은 항로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앞서 저는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를 소개해 드리면서, 노아는 하나님이 ‘맘 놓고 맡길만한 사람’이었기에, 세상의 빛을 위해 살려두신 위대한 남은-자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물음을 넘어, 오늘 본문은 사순절을 맞아 예배하는 우리에게 “그 사람이 되려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노아를 존경하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노아와 같은 자를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물음 앞에 주님의 크신 은혜와 인도하심과, 그 넓은 사랑을 신뢰하며, 우리 시대의 남은-자로 거듭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