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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의 길, 증인의 길이 된 내력”

(눅 24:13-17, 25-32, 44-48)

<2025년 6월 22일 성령강림 후 제2주 순교자기념주일 설교 / 녹색>

●김은국의 『순교자』

오늘 우리는 성령강림절기를 맞아서 <순교자기념주일>로 예배하러 모였습니다. <순교자기념주일>이라고 하면, 다소 무겁고 비장한 마음이 들어서 겁부터 나는데, 그래서 그런지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박해받을 때 위대한 ‘소수의 순교자’가 있던가 하면, 반대로 ‘다수의 배교자’ 있곤 했습니다. 그만큼 죽음 앞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텐데, 이런 점에서 오늘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 그중에 특별히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것은 무척이나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전 미국에서 활동하시다가 지난 2009년에 세상을 떠나신 재미작가 김은국(Richard E. Kim, 1932-2009)이라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쓰신 『순교자』(The Martyred, 문학동네)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책이 1964년 미국에서 출판되었을 때 20주 연속이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최초의 한국인 작가로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를 만큼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품을 보면 6.25 전쟁 당시 순교자와 배교자에 대한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책에 보면, 전세가 계속 밀리던 한국군이 드디어 북진에 성공해서 평양을 탈환하게 됩니다. 평양에 도착한 한국군은 6.25가 발발하기 직전, 그곳 평양에서 인민군에 의해 벌어진 ‘목사 집단 처형 사건’에 대해 알게 되는데, 소설에 나오는 육군본부 정보처의 ‘이 대위’라는 인물이 그것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게 됩니다. 내용인즉슨 14명의 목사 중 12명이 인민군에게 처형되고, 2명은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12명과 2명 중 누가 순교자고 누가 배교자일까요? 12명이 순교자고 2명은 배교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건을 자세히 파헤쳐 보니, 그렇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12명의 목사는 신앙을 일치감치 저버리고 북한 공산당에 협조하면서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더는 쓸모가 없자 북한 인민군이 그들을 처형한 것인데, 죽기 직전까지 ‘살라 달라’고 울부짖다가 아주 비굴하게 처형된 자들이 그 12명이었던 것입니다(12제자를 상징?).

반면에 북한 인민군이 살려준 2명의 목사를 보면, 한 사람은 극심한 고문으로 인해 정신 이상자가 되어서 살아남은 것이고, 다른 한 사람, 소설에서 ‘신 목사’라고 하는 인물은 인민군의 총살 협박 앞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것은 물론이고, 인민군 장교에게 침을 뱉을 정도로 강하게 저항하던 목사였는데, 그를 심문하던 인민군 장교가 죽음 앞에서 너무나 당당하고 성직자다운 기품을 유지하던 그에게 감동하여 차마 죽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모르던 사람들은 12명의 그 비굴한 목사들을 ‘순교자’라 추앙했고, 반면에 인민군으로부터 살아남은 2명의 목사, 특히 그 신실하고 강단 있던 신 목사를 ‘가룟 유다와 같은 목사’라고 부르면서 조롱했던 것입니다. 이 책 『순교자』는 이러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통해서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과연 누가 참다운 순교자인가?’와 같은 묵직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순교자기념주일>을 맞은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의 마지막 24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데, 지난 1월부터 시작된 누가복음 설교가 오늘로 마감되고, 다음 주부터는 사도행전으로 넘어갑니다. 지금까지 복음서에서 만난 제자들,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였는데, 오늘 본문을 기점으로 그들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이제까지는 ‘그저 그런 별 볼 일 없는 제자’(Disciple of little renown)였지만, 오늘 본문 이후로 그들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삶을 내던진 사도’(Apostle who abandoned his own life)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무엇이 그들을 변화시킨 것일까요? 저들 삶의 변화에 있어 무엇이 변화의 분수령이 된 것일까요? 이처럼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오늘 본문에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나오는데, 저들의 상황이 변하는 것에 따라서 저는 오늘 본문을 “13-17, 25-32, 44-48절”로 세 단계로 나누어보았습니다. 첫 번째 본문은 절망에 사로잡혀 힘없이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두 번째 본문은 그들에게 일어난 기막힌 변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세 번째 본문은 변화된 제자들에게 주님이 ‘증인이 되라!’는 사명을 주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교회를 처음 다닐 때,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듀엣이 부른 “엠마오의 두 제자”라는 곡을 참 많이 불렀던 기억이 나는데, 1절 노랫말이 이렇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그렇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의 심정 어떤지 노랫말이 그대로 들려주는데, 절망스럽고도 공포스러운 마음으로 그들은 엠마오를 향해 추적추적 길을 걷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엠마오’(Ἐμμαούς, 엠마우스)라는 단어는 “따뜻한 샘”(Warm Spring)을 의미하는데(윤국영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가는 길”, ioch.kr), 엠마오라는 곳은 예수님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라는 유대 역사학자도 지명을 언급할 정도로 당시 실제로 있던 곳이긴 하지만(『요세푸스 Ⅲ』-유대 전쟁사, 7.10.9 §217), 이곳이 어딘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래서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 그곳을 향해 가는 두 제자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뒤로하고 번민과 좌절, 그리고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치듯 그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이름이 ‘따뜻한 샘’이기는 해도, 두 제자는 이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엠마오는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일시적으로 달래주는 미지근한 물일 수는 있어도, 그곳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16)와 같은 불안의 도시요, 절망의 도시일 뿐입니다.

●엠마오 길의 주님,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엠마오가 있습니다. 앞서 “엠마오의 두 제자” 1절을 나누었는데, 2절 가사 전반부는 이렇습니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근심이 앞길~ 막으나” 가사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삶은 마치 엠마오로 향한 길과도 같이 불안과 근심이 끝없고, 절망이 끝없습니다. 뭐가 하나 해결되는 것 같다가도, 더 큰 일이 앞길을 가로막아 주눅 들게 됩니다. 뜨끈한 온탕인 줄 알고 몸을 담갔지만, 이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하고 눅눅한 늪에 빠져 탄식만 거듭합니다.

우리가 이런 길을 걷고 있다면, 그 길에서 만나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그림으로 보시는 것처럼, 엠마오의 길에서 주님은 절망에 사로잡힌 두 제자의 애처로운 등을 두드려주시고, 상심한 마음을 포근히 감싸 안아 주십니다. 노래 “엠마오의 두 제자”의 가사 후반부가 “주 예수 우리에게 나타나시사 새 소망을 주심을 믿사옵니다”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가 걷는 엠마오의 길에서 삶의 주관자 되시고,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이 되어주시는 주님을 만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더 본질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등을 두드려주시고, 감싸 안아 주셔도 때로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손길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본문 15-16절을 보면,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서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보폭을 맞춰 걸으시는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그가 주님인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이 말하기를 ‘그들은 자기들의 허탄한 생각과 말’에만 골똘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관, 절망, 부정의 늪

이 구절을 다소 투박하지만, 성경 원문에서 우리말로 직접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논쟁할 때, 일이 일어났다. 곧 그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까이 가셔서 그들과 동행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지배당하고 있어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15-16)(kai. evge,neto evn tw/| o`milei/n auvtou.j kai. suzhtei/n kai. auvto.j VIhsou/j evggi,saj suneporeu,eto auvtoi/j oi` de. ovfqalmoi. auvtw/n evkratou/nto tou/ mh. evpignw/nai auvto,n) 15-16)

마지막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말 성경에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로 보면 무엇엔가 “지배당하고 있어서”(krate,w)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눈이 무엇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논쟁하는 말’에 지배당한 것입니다.

그 말은 어떤 말입니까? 온통 비관적이고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말입니다. 그들은 ‘누가 누가 더 비관적으로 말하나’ 마치 경쟁하듯 비관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절망적인 말로 받아치면, 마치 ‘나는 그것보다 더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더 부정적으로 몰아치면서 두 사람은 거듭거듭 자기들을 어둠으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주님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동행하시는 그 거룩한 영적 현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에 보면 두 제자는 급기야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다”(24:17)고 말하는데,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멈추어 ‘서서’ 하는 얘기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으신 ‘고난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거룩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고난이 없었다면 우리가 누릴 구원도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비록 주님의 고통과 희생으로 점철된 것이지만,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결코 절망적이거나, 비관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두 제자 중 하나인 글로바는 “당신은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18)라고 주님을 비난하고 꾸짖기까지 하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얼마나 헛도니 일인지 장광설을 늘어놓고만 있습니다.

●절망에서 소망에로의 전환점 엠마오: 말씀과 떡

이처럼 엠마오로 향한 그들의 길이 절망의 길로 끝날 것처럼 보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길은 끝내 ‘소망의 전환점’이 됩니다. 다메섹으로 향하던 바울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고 부르시는 주님으로 인해 극적으로 변화된 것처럼(행 9:1-9), 그토록 절망적이기만 했던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엠마오에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예수님이 “성경 말씀을 자세히 풀어주시면서 떡을 떼어 주시는 순간”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눅 24:27-31).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제자들의 눈이 자기들의 생각과 자기들의 말에 지배당할 때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더니, 이제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히자 눈이 환하게 밝아진 것입니다. 특별히 30절에서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는 구절을 보면, 자연스럽게 “성만찬”이 떠오르는데, 어거스틴(St. Augustinus)은 이 구절에 깊은 영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설교하기를 “주님이 엠마오에서 떡을 떼실 때에야 자신을 알아보도록 허락하신 것은 이후로 성도들이 성찬의 떡을 뗄 때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합니다<Sermon 235 “On the Road to Emmaus” from SermonsⅢ(The Works of Saint Augustine) Vol 7: Sermons 230-272B, New City Press). 이처럼 엠마오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은 주님의 말씀으로 빚어진 거룩한 성찬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에 대해 32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제자들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라고 탄복합니다. 먼저는 뜨뜻미지근한 엠마오를 향해 힘없이 터벅터벅 걷던 제자였지만, 이제는 마음에 뜨거운 불을 품은 살아있는 신앙인으로 변모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을 들은 뒤에 일어난 커다란 변화였던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The Supper at Emmaus” in 1629

1629년,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는 엠마오에서 일어난 이 거룩한 장면을 아주 인상 깊게 그렸는데, 1번으로 표기한 것처럼, 말씀을 가르치시고 떡을 떼어 주시는 주님이 환하게 빛나고 있고, 2번에서처럼 그 경이로운 주님의 모습 앞에 제자 하나가 기겁하며 놀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화가 렘브란트는 어둠과 빛을 정확히 50:50으로 양분해서,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오른쪽은 눈부시도록 환하게 그렸고, 반대쪽은 칠흑같이 어둡게 그렸는데, 3번을 자세히 보면, 어둠 속에서 뭔가 꼬물거리며 일하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데, 렘브란트는 그에게도 부활의 빛을 나누어줍니다. 주님의 거룩한 임재가 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그림의 명도를 좀 더 밝게 해서 보면 보이지 않던 한 인물이 나타납니다. 물론 3번의 인물도 좀 더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4번을 자세히 보시면 또 다른 제자가 주님 발아래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2번의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면, 4번으로 보이는 다른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께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렘브란트의 시선으로 보는 엠마오의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과 떡으로 빚어진 성만찬을 베풀었더니, 두 제자의 마음에 광명한 빛이 비쳤고, 식탁에 앉은 제자는 ‘경이로움’으로, 그리고 주님께 무릎 꿇은 제자는 ‘경배’의 모습으로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패배의 길이 변하여 소망의 길이 된 것입니다.

●증인 = 순교자

이처럼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은 오늘 세 번째 본문에서 다시 모든 제자에게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앞서 두 제자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이제 모든 제자에게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다시금 말씀을 풀어주셔서 그들로 하여 성경을 깨닫게 하시더니, 본문 48절에 이르러 위대한 말씀을 주십니다. 함께 읽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는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일의 증인이라고 말입니다. 이로써 궁극적으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더는 패배와 절망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허탄한 너희 생각과 너희 말에 지배당하지 말고, 그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라도 주의 말씀에 붙들려 사는 ‘증인이 되라’고 말입니다.

“증인”(witness)은 본래 “법정에서 증언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 법정에서 증인의 진술은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만큼 중요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증인은 자기가 ‘본 것, 들은 것’을 사실대로 말해야 합니다. 유불리에 따라 거짓을 말하면, 증인은 위증죄로 처벌받습니다. 증인이란 말은 헬라어로 ‘마르튀스’(ma,rtuj)라고 하는데, 이 말이 기독교 역사에서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됐습니다. 영어로 표기하면 스펠링이 거의 같은데, 초대교회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증인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증언’하다가 ‘순교’했기 때문에, 증인이란 말은 순교자라는 말과 동의어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앞서 함께 읽은 48절을 다시 읽으면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순교자가 되라”고 바꾸어 읽어도 무방합니다.

●배패의 길, 증인의 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교자기념주일>을 맞아 예배하는 오늘 우리는 ‘증인’ 아니 ‘순교자’라는 단어가 누가복음에 처음으로 나오는 본문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당부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이제 다음 주부터 나눌 사도행전에서 위풍당당한 ‘사도’로 맹활약을 벌일 것이고, 그들은 끝내 목숨도 아끼지 않는 위대한 순교적 삶을 살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양 중에 “사명”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찬양이 아주 좋지만, 가사를 끝까지 읽기가 어렵습니다. 이 노래는 스데반을 비롯한 순교자들을 위한 노래, 우리나라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분들에게 헌정할 노래이긴 해도, 곡조가 좋다고 아무 생각 없이 흥얼거리기에는 우리 믿음과 너무나 큰 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가 이 노래를 목청 높여 부를 만큼 아직 순교자의 신앙을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순교적 삶을 살았던 저 위대한 사도들도 원래는 실패자였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만 대표로 나와서 그렇지, 사실 열두 제자 모두 철저한 패배자요, 비겁한 도망자에 불과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주님이 찾아가 주셨고, 끝내 그들로 하여 패배의 길이 아닌, 증인의 길, 그리하여 순교의 길을 거침없이 나설 수 있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껏 우리 신앙이 주님 앞에, 사람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해도, 주님은 그런 자들을 변화시키셔서 위대한 사도로 삼아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변화는 결국 말씀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란 점입니다. 전에도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지만, 변화는 없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언제나 뜨뜻미지근한 엠마오를 찾는 신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패배의 길을 걸을 때, 주님은 다시, 그리고 또다시 제자들을 찾으셨고, 다시, 그리고 또다시 전에 주시던 그 말씀으로 제자들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들이 말씀의 사람이 될 때, 비로소 마음이 뜨거워졌고, 주님은 그런 그들을 증인으로 삼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서는 안 될 엠마오를 향한 패배자의 길을 걸었지만, 길 되신 주님이 엠마오조차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말씀의 때가 주어진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주님 말씀으로 인해 몸부림치고, 말씀과 씨름하고, 말씀으로 눈물 흘리고, 그리하여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때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패배의 길에서 벗어나, 다시 용기를 내어 증인의 길을 걷는 믿음의 길을 걷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