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정원에서, 꽃의 언어로

- 서평 / 정원사의 사계(김순현, 늘봄, 2019)

<임태일목사/서강교회>

모국어가 없는 곳에서 십여 년 넘게 살다 보니 한글로 잘 여문 문장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이왕이면 문학이면 좋겠는데 언어의 사원에서 사나흘 묵은 시어들이면 더 좋겠다. 게다가 성서와 신학의 정수를 톺아볼 수 있는, 그래서 나의 목회와 선교에 빗금과 밑금을 교차로 그을 수 있게 돕는 책이라면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쁨일 것이다. 정원사 김순현목사의 책 <정원사의 사계>가 그렇게 왔다. 저자의 책을 받아들었을 때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나갈 요량이 없었다. 서제가 ‘사-계’라는 느릿한 시간성을 말하기도 했거니와 인간의 몫이라곤 당최 ‘자라게 하시는 이’에게 순명하는 것뿐이라 설파해왔던 그 ‘정원사’와 마주했던 까닭이다. 겨울로 시작하여 겨울로 끝나는 정원사의 실다운 이야기는 책 속에 다소곳이 들어앉은 빛그림들과 함께 우리로 하여 “우주의 가슴팍에 새겨진 하나님 말씀”<14쪽>으로 안내해 주고 있었다. 그 길 가에 꽃이 있었다.

인류 최초로 정착생활을 시도했던 1만 년 전의 나투프인들(Homo Natufians)은 죽은 자를 장사하기 위해 꽃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갈멜산 주변으로 흐드러져 뿜어내는 꽃들의 향기는 이생과 저생을 잇는 비밀의 전령이라 믿었던 것일까. 정성스레 꽃을 모아들이고 그것들을 진흙에 이겨 무덤 안과 밖으로 부품히 채워 넣었으니 말이다. 이쪽 무덤가에 선 이들의 애달픈 심정이 꽃-향기라는 전령에 이끌려 저 안쪽 너머로 휘움해 들어갔으리라.

그래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선물은 에덴이라 이름한 정원이었던 걸까. 이 책 <정원사의 사계>가 눈여겨 증언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정원에서 체포되셨고(요 18:2), 정원에 있는 무덤에 안치되셨으며(요 19:41-42)” 그것도 모자라 “정원사의 모습으로 부활(요 20:15)”(67쪽)하신 것은 그 비밀을 맡은 전령들의 자리와 위치를 염두에 두셨던 까닭이리라. 하기사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 레어티즈는 그의 누이 오필리아의 장례식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누이를 묻어라. 아름답고 깨끗한 그 몸에서 오랑캐꽃 피리라!”

꽃들과 한창 연애중인 정원사를 잠시 붙잡아 ‘왜 비밀의 정원인가’고 물었다. 정원사가 말한다. “‘비밀의 정원’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정원지기의 모습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생명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교회가 왜 정원을 일구어야 하는지, 교회가 낙원을 얼핏 보여주는 곳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회가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고 이야기하려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자신의 존재로 생생히 증언하고, 정원 일이야말로 우주의 가장 깊은 신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일(토마스 베리)임을 알록달록 오색 빛깔로 깊고 그윽한 향기로 묵묵히 일깨우고 있다.”(111-112쪽)고.

참으로 그러하다. 1만 년 전 나투프인들의 꽃무덤을 2천 년 전 예수 무덤에 견주어 접붙히니 이른 새벽 동살 같은 ‘비밀의 정원’이 비로소 견인된다. 즉, 내밀히 감춰져 있어서 비밀의 정원이 아니라, 오히려 정원은 이미 ‘세계의 축’(74쪽)으로 계시되었고 “지금 나 한 사날 잘 열리고 있어 / 누구나 오셔, 아름답게 놀다 가셔”(162쪽)라 공히 포고되었으나, 세상이 외면하여 하릴없이 감춰진 비밀의 아우성으로 수런대는 곳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이유로 비밀의 정원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품부된 본성에 충실하게 피어나, 더없이 환한 꽃등으로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마음속에 놀람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는”(90쪽) 은총을 누린다. 함초롬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는 그 순간만큼은 세파에 가스러진 몸과 말을 추슬러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봐야, 사는 게 꽃 같아야!”(200쪽)(‘꽃’ 대신 써왔던 그 말 대신에)

하지만 정원사의 길이 그저 ‘꽃길’(?)만은 아닌 듯하다. 순탄치 못하다 급기야 “괜히 정원을 일궜어.”(125쪽)라며 뜻밖의 고백을 한다. 때론 동장군에게 욱여쌈을 당하다 발만 동동 구른 채 “섬 한가운데 시신처럼 누워”(26쪽) 있어야 했고, “아름다움을 사랑한 죄”(123쪽)에 걸려 한대수의 “물 좀 주소”를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읊조리기도 했단다. 이는 마치 앗수르에게 망해버린 북이스라엘의 곡소리가 채 흩어지기도 전에 바벨론이라는 더 사특한 군병들이 남유다까지 밀고 내려와 숨통을 낚아 챈 형국이라고나 할까. 허나 그발강가에서 손 놓고 목 놓아 울던 유대 포로들에게 예레미야는 무어라 편지를 띄웠는가.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렘 29:5)고. 그리고 그 편지를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두 손에 꼭 쥔 채 놓지 않았던 에스겔은 예레미야에게 답가를 부르지 않았던가.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 같이 되었다!”(겔36:35)할 날이 오리라고.

성경은 인간이 절망할 때마다 어김없이 에덴을 일깨운다. 에덴에서 상실한 그 생명수가 새 예루살렘 정 중앙으로 흐르고, 그 양 옆으로 생명나무가 자라 만인을 소성하리라는 요한의 최후 진술조차 그러하지 않았던가.(계 22:1-2) 하여, 정원사는 “꽃의 언어”(188쪽)로 소통함이 옳지 않겠는가고 주문 한다. 자신 또한 그 언어에 귀가 트이고 말이 열렸을 때, 그 감탄과 찬미의 언어가 있어서 비참한 만큼 소란했을지라도 소란했던 만큼 절절했을 뿐이었으므로. 이내 정원사는 구근으로 피는 꽃들의 이름을 마치도 주께서 보내신 “어벤저스”인양 소환해 낸다. “수선화! 튤립! 알리움! 크로커스! 무스카리! 히아신스!”(202쪽) 늦가을 암암적벽이 목전일 때에 정원사는 저들과 함께 오히려 힘찬 적벽가를 합창했던가보다. 그 노래를 “부지런히, 세심히, 거춤거춤 하지 않고 면밀히”(203쪽) 불렀다는 악상기호와 함께.

** 이 글은 애리조나에 거주하던 2019년, "기독교세계"(2019년 10월호)의 청탁으로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