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침공 사건과 드러난 밀사의 정체”
(요 10:1-15)
<2023년 4월 30일 부활절 제4주 설교 / 흰색>
●창세기 1장의 하나님 사랑 이야기
의심할 여지 없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성경은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주고자 안달이라도 난 듯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성경 어디를 펴도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성경이 시작되는 창세기 1장만 열어봐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사실 천지창조 이야기는 고대 근동 지역에 일반적이었습니다. 수메르와 악카드 그리고 이집트와 같은 당대 최고의 문명들은 저마다 고유한 창조신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창조신화는 “신들은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다룹니다. 처음부터 매우 장황하게 신들의 탄생에 대해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 신들의 복잡한 관계로부터 우주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설명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신화 끄트머리에 마치 부록처럼 인간 창조 이야기가 겨우 붙어 있는데, 사실 그런 설명은 있으나 마나 할 정도로 미미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저 유명한 “바벨론의 창조신화”([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를 보면,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불순하기만 합니다. 곧 인간은 신들이 해야 할 강제 노동을 대신하는 존재로 창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제임스 B. 프리처드 편집, 강승일 등 번역, 『고대 근동 문학 선집』, CLC>
이에 반해 창세기가 말하는 인간 창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다른 그 어떤 피조물보다 더 많은 관심과 특별한 정성을 기울여서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마치 우주 만물을 인간을 위한 선물로 창조하신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러니 인간 창조는 가히 ‘하나님 창조 사역의 클라이막스’라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창세기는 다른 그 어떤 피조물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지음 받았다.” 말함으로써,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권과 왕권이 수여된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강성열 지음, 『고대 근동 세계와 이스라엘 종교』 한들출판사>
가히 인간은 온 우주 만물 중에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걸작품인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신이 이렇게 정성을 기울여 인간을 만들었단 말입니까? 세상의 어떤 신이 자신의 형상, 곧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닮도록 인간을 만들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걸하시는 하나님
이런 이유로 요한일서는 “하나님은 사랑”(요1 4:8)이라고 쐐기를 박습니다.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하나님을 온전히 정의 내릴 수는 없겠지만,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위대한 가치인 ‘사랑’이라는 단어 외에는 하나님을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성경을 이런 말로 종종 표현하곤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사랑을 구걸하시는 하나님 이야기”라고 말입니다. 곧 하나님은 “사랑을 구걸하시는 하나님”(The Beggar for Love)입니다. “구걸한다”는 말을 하나님께 쓰는 게 다소 불경스럽게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느끼면 느낄수록, 곧 하나님이 구걸하신다는 표현이 불경스러워 받아들일 수 없으면 없을수록, 하나님은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내버리셨으며, 그리하여 자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끝도 없이 사랑을 구걸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구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결정적인 고백이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입니다. 이로써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정도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실 정도로 하나님은 인간의 사랑을 구걸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이 멸망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사건, 우리는 그것을 “성육신 사건”(Incarnation)이라 부릅니다.
●사랑의 밀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침공 사건
오늘날 최고의 기독교 지성인이자 변증가인 C.S. 루이스(C.S. Lewis, 1898-1963)는 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하나님의 침공 사건”이라 불렀습니다. C.S. 루이스는 설명하기를, 본디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하나님께 반란을 꾀한 사악한 영들이 타락해서 세상을 죄로 어둡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세상이 적들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으셨고, 타락한 반역자들에게 점령당한 세상으로부터 인간을 구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합법적인 왕으로 변장해서 세상에 상륙”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육신 사건이라는 설명입니다.<C.S. 루이스 지음, 장경철,이종태 옮김,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그의 표현이 무척이나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멋집니다. 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의 상륙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인천상륙작전에 비할 바 없는, 인류 역사를 뒤집은 위대한 작전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을 지으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요 1:14)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성육신의 의미를 박노해 시인의 “사랑의 밀사密使”라는 시로 음미합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나는 빛의 밀사로 여기 왔다
어둠 속에 빛을 찾는 네 눈동자에
나는 사랑의 밀사로 네게 왔다
마음이 가난한 자 네 아픈 가슴에
나는 간절히 기다려온 너의 방 앞에
가만가만 다가가 문을 두드린다” (후략)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나눔문화, nanum.com>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침공 상륙작전에 따라 이 세상에 사랑의 밀사로 오신 분이었습니다. 밀사로 오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사랑의 샘이 솟고, 그분의 삶에 사랑이 녹아있으며, 그분의 말씀에는 세상을 치유할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배알도 없고, 자존심도 내다 버린 하나님, 구걸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육신 사건의 핵심입니다.
●요한복음 9장의 사건: “눈먼 안내자”(Blind Guide)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0장은 자칫 1세기 어느 목장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목가적인 풍경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직전에 나오는 요한복음 9장과 함께 읽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오히려 긴장감과 위기감이 감돌기까지 합니다.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다가 예수님을 만나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지난 사순절 기간에 이 본문을 가지고 은혜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가 눈을 뜨게 되었다면 뭉클한 감동이 밀려오는 이야기여야 했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차라리 눈 뜨지 않은 것만 못하다!’ 싶을 정도로 주인공은 비정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온갖 조롱과 모욕과 수모를 당하다가 급기야 공동체 밖으로 쫓겨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9:34). 여러분도 그 내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서슴없이 벌인 것인지 9장 22절은 고발하기를, “이미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곳곳을 다니시며 사람들을 고치셨고, 오천 명을 먹이셨으며, 자기들과는 다른 가르침으로 뭇 백성들에게 관심을 받게 되자, 저들은 주님이 안식일에 눈먼 자를 고쳐준 것을 빌미 삼아 주님의 입을 틀어막고 손과 발을 포박하려 했던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예수님이 행하신 거룩한 일, 곧 “눈먼 자가 눈을 뜨게 된 일”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9장은 우리에게 “과연 누가 맹인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대답합니다.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사랑의 밀사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영적인 맹인”이라고 말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멀었으면서도, 팔에 완장이라도 찬 것 마냥, 다른 사람들을 훈계하고, 지적하며, 지독하리만치 구석에 몰아세우다 못해 공동체에서 쫓아낸 “눈먼 안내자”(Blind Guide)<레슬리 뉴비긴 지음, 홍병룡 옮김, 『요한복음 강해』, IVP>로 판명된 것입니다.
●양의 문이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제 10장에서 예수께서는 “눈먼 안내자”인 바리새인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합니다.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바리새인에 대해 직접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일절 응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자신이 할 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는 드디어 바리새인들을 향해 입을 여십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께서는 어느 양 치는 목장을 설정하시고, 그 목장을 드나드는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와 바리새인의 정체를 명확하게 밝혀주십니다.
먼저, 예수님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오늘 본문 7절에서 주님은 “나는 양의 문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문을 출입하는 양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는 존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11절과 14절에서 두 번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 14)라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라 말씀하신 것은 그렇지 않은 ‘악한 목자’ 또는 ‘거짓 목자’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구약성경 중에는 하나님이 거짓 목자들에게 가차 없는 심판의 말씀으로 폭격하는 성경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34장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에스겔서 34장과 함께 읽으면 좋습니다. 에스겔서 34장은 거짓 목자에 대해 말하기를, 그들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거짓 목자는 “연약한 자를 위로하지 않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않으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거짓 목자는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않고,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않으며, 다만 포악으로 양들을 다스린다”고 합니다.(겔 34:3-4)
결국, 에스겔서가 말하는 거짓 목자는 양들을 돌보기는커녕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양들을 내쫓거나, 양들을 잡아먹는 목자들입니다. 이러한 거짓 목자의 사나운 횡포로 인해 양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되어 들짐승의 밥”(겔 34:5)이 될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의 대가인 D.A. 칼슨(D.A. Carson, 1946-) 교수는 “요한복음 10장과 에스겔서 34장은 당시 각자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강도 높은 비판(highly critical)”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Carson, D.A.,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삯꾼 그리고 절도와 강도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선한 목자’는 나오지만 이에 반대되는 ‘거짓 목자’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선한 목자에 반대되는 존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 그렇습니까? 흔히 알기를 선한 목자의 반대는 “삯꾼”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삯꾼은 그저 “품삯을 받고 임시로 고용된 일꾼”(the hired hand)에 불과합니다. 전에 무엇을 했는지 상관없이 일정 기간동안 일정 금액을 받고 와서 임시로 일하는 사람이 삯꾼입니다. 그래서 12절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도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존재”라고 합니다. 어차피 임시로 고용된 삯꾼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차라리 돈을 안 받으면 안 받지, 양을 지키고자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습니다. 편의점에 임시로 고용된 알바생이 칼 들고 달려드는 강도를 잡지 않았다고 비난받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삯꾼은 그냥 그런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 속에서 선한 목자에 반대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8절이 그 해답을 들려줍니다. 곧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하십니다. 곧 “절도와 강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에스겔서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에스겔은 자신에게 부여된 목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뿐더러, 탐욕스런 욕심이나 채우려 했던 당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거짓 목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으라!” 예언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훨씬 더 나갑니다. 예수님은 당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거짓 목자는커녕, “너희는 절도요 강도다!”라고 보다 직설적이고도 강도 높게 호통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무책임한 거짓 목자의 단계를 뛰어넘습니다. 앞서 요한복음 9장을 살펴본 것처럼, 저들은 “날 때부터 눈먼 자가 눈을 떴다”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를 못살게 굴고, 비참하게 만듭니다. 가족까지 건드리면서 협박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급기야 그를 울타리 밖으로 쫓아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을 내쫓아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이것은 누구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을 잡고자 애먼 사람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1절이 말하는 것처럼, 저들은 “양의 문”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며, 예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양의 문을 통해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존재”가 분명합니다. 저들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능력과 기적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훼방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양이 들어가 있는 우리를 파괴하고, 그 우리 안에 든 양 무리를 흩고 빼앗아 죽이려 달려드는 절도요 강도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밀사의 정체와 세 가지 축복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양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만 다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They will come IN and go OUT, and find pasture)고 말입니다. “들어가며 나오며”라는 말은 한자로 “출입”(出入)이라 합니다. 우리에게 시편 121편을 떠오르게 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까지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5-6, 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이 양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출입하는 삶이기를 축원합니다. 한국 교회의 출입이, 여러분 가정의 출입이, 여러분이 일하는 회사의 출입이 양의 문과 같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합니다. 목자는 양과 음성으로 교감합니다. 양은 한 치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양은 음성으로 목자와 강도를 구분하고, 목자는 양의 음성을 세심하게 듣습니다. 특별히 본문은 말하기를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른다”고 합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반려견은 이름이 “뚱이”입니다. 녀석이 우리 집에 올 때 이전 주인이 지어준 이름인데, 그 녀석 생김새를 보니 전 주인이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이해가 갑니다. 당시 목자들도 그랬다는 겁니다.
심지어 오늘날 중동지역의 목자들은 자기 양들의 생김새나 특징에 따라서 귀기 길쭉한 양은 “귀-길쭉이야~”라고 부릅니다. 코에 흰 점이 있는 양은 “흰코백이야~”라고 부른다고 합니다.<부르스 밀튼 지음, 정옥배 옮김, 『요한복음』 IVP> 본문에서 주님이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른다” 하신 것은 그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하신 주님이 온유하신 음성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실 때 그 음성에 응답하시고, 그 음성만을 따라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목자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에만 길들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굳이 인공지능이나 보이스피싱 같은 게 아니어도, 마치 주님의 음성인 양 우리의 귀를 헷갈리게 만들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거짓된 소리들이 많습니다. 그 많은 소리 중에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을 분별해서 듣고 따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로, 오늘 본문 11절과 15절에서 두 번씩이나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앞서 저는 C.S.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 사건을 “하나님의 침공 사건”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반역자들에게 점령당한 세상으로부터 인간을 구하시고자 “합법적인 왕으로 변장해서 세상에 상륙”하신 것입니다. 합법적인 왕이신 예수께서 지금 무엇으로 변장하고 계십니까? ‘목자’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는 최-하류층에 속한 직업군이었습니다. 일 년 365일 중 거의 대부분을 들판에서 짐승들과 함께 생활하므로 그들은 유대교가 명하는 정결법을 준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목자는 ‘더러운 사람’인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도 그렇지만, 실제로 씻을 물도 없어 더럽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것은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으로 묘사될 일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든지 가보면 벽이나 그 밖의 공간에 스위스의 알푸스와 같은 푸른 초장에 있는 근사한 목자를 그려놓곤 하지만, 메마른 유대 땅에 그런 푸른 초장은 없습니다. 다만 목자는 양 무리를 이끌고 풀 한 톨이라도 돋아난 땅을 찾고 또 찾아다니며 양 무리를 이끌고 다닐 뿐입니다. 알푸스 초장에 사는 양들은 지천으로 널린 풀로 인해 제 갈 길로 뛰어 다니지만, 유대 광야의 양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목자의 뒤를 빠짝 따라다녀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에 대해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절도, 강도 그리고 목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여러분, ‘절도와 강도’가 낫습니까? 아니면 ‘목자’가 낫습니까? 목자가 낫지요? 그런데 바벨론 탈무드에 따르면 이 세 사람은 유대 법정에서 모두 똑같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탈무드는 목자에 대해 말하기를, “그들은 자신의 짐승을 남의 땅에 고의로 풀어놓는다. 그들은 강도나 마찬가지다(therefore considered like robbers). -- 그러므로 목자는 법정에서 증인으로서 진술 효력이 없다(They are disqualified from bearing witness).”<The William Davidson Talmud, Sanhedrin 25b, safaria.org>고 합니다.
우리를 먹이시는 주님이 “나는 목자”라 하심으로 스스로 유대 법정에서 강도 취급을 당하신 것은 아닙니까? 이처럼 주님은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 강도 취급을 당하시다가 끝내 강도들과 나란히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분 아니십니까? 이로써 주님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밀사이며, 사랑의 목자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사람들에게 ‘더러운 사람’라 불리며 수치심을 당하는 것에 아랑곳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유대 법정에서 ‘강도와 똑같은 인간!’이라 손가락질받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한 목자되신 주님이 여러분의 굴곡진 삶에 찾아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밀사로 오셨기에 우리 영혼이 깨어 있어야 주님을 알아볼 수도 있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온유하신 주께서 온유한 음성으로 ‘아무개야! 아무개야!’하고 여러분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실 때, 양의 문으로 들고 나며, 거룩한 주의 복과 은혜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